휘는 일관(日觀)이고 자는 미상, 호는 미상이다. 그의 자와 호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규명해야 될 부분이라 생각된다. 생년은 미상으로 여태 편찬된 세보와 족보에 의하면 생몰년이 모두 미상이었다. 승정원일기가 번역되면서 승정원일기 숙종 31년 신유 1705년 6월 29일의 13기사에 22일 李日觀이 사망했다는 平安監司의 서목 에 平安監司書目, 昌城府使李日觀, 今月二十二日身死事。라 하여 그가 1705년 6월 29일에 졸한 것이 확인되었다.〈승정원일기〉 여태 그는 무과에만 급제했다고 등록되었을 뿐, 1810년, 1829년, 1910년의 족보에도 그의 묘소 위치나 행적에 대한 내용은 전혀 미상이었다.
선대
시조 휘 양식(陽植)은 고려 인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에 이르렀고, 2세 순우(純祐, ?~1196)는 문헌에 처음으로 이름을 남긴 선조로써 의종때 문과에 장원, 한림학사 국자제주 대사성에 이르렀고 금성군(錦城君)에 봉군되었다. 금성군이 무신정권의 문신대량학살 때 살해되자<동사강목,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명신전(남공철)>, 그 아드님 적(迪)은 강릉우계의 해령산으로 은거<대동보>하셨으며, 호를 옥계(玉溪)라 하고 호장을 역임하셨다. 적의 아들은 홍준(洪俊)과 공용(公用)인데, 공용은 기록이 실전되었고, 홍준은 중윤과 호장을 역임하였다. 홍준의 아들 구(球, 1265~?)는 18세에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임금이 친히주관)의 진사시에 합격하고 돌아와 예빈시승과 예빈시경동정을 역임하고, 구의 아들 백경(伯卿, 1290~?)은 영동정, 천승(天升)은 검교군기감정인데, 백경의 아들 사성(思成)은 밀직대부로 중추원사에 추봉되었다. 사성의 아들이 억(山+疑)이다.
억(山+疑)은 고려말기에 유장으로 강계원수와 밀직부사를 역임하며 요동정벌에 훈공을 세웠으나,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삼고의 예로 도평의사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순흥의 소백산으로 은거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후에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도평의사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에 추서되고, 원종공신 1등관에 녹훈되고 토지와 전답이 내려졌다.
휘 억이 만과 직장 원길(原吉)을 낳고, 만(蔓)은 고려말에 무과에 급제하여 홍로부사, 인진사 등을 거쳐 중추원부사와 사재감을 역임하였으나, 조선 건국후에 벼슬이 강등되어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으로 별세하였다가 후에 판중추부사에 증직 추서되었다.<대동보, 양경공 정희계 묘갈명(양경공은 이만의 처부)> 휘 만은 계림부원군 양경공 정희계(鄭熙啓)의 따님을 배위로 하여 1남 인숙과 1녀(女 閔無恤)를 두었으니, 인숙(仁淑)은 조선에서 관직에 올라 사정, 중추원경력을 거쳐 통훈대부가 되었으며 1435년 왕명을 받고 지덕천군사로 부임하니, 지덕천군사(덕천군수)로 부임한 사실이 세종실록 18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벼슬이 판사복시사에 이르렀다.<대동보, 세종실록 세종 18년 기사>
휘 인숙은 지인천군사 오부(吳傅)의 따님을 배위로 하여 4남 3녀를 두었으니, 그중 차남 경연(景衍)이 그의 9대조가 된다.
경연(景衍)은 소위장군 행충무위 부사정을 역임하고 사후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추증되었는데〈세보〉, 무과 급제자들의 가계를 정리한 무보(武譜)라던가, 하동정씨 정현조의 배위 기록에도 配정경부인(貞敬夫人)우계이씨(羽溪李氏)이고 父는 전직(殿直) 증이참징(贈吏참徵)이요 祖는 호군경행(護軍景行)이며 曾祖는 경역인숙(經歷仁淑)이고 外祖는 장령허적(掌令許迪)이다 忌日은 正月二日이고 묘광주 신원(新院)이다〈하동정씨문성공파세보〉 로 되어 있어, 경연의 생전 최종 관직은 정4품직 호군이었던 것이다. 경연이 광주 대장리에 처음 정착했는데, 이후 그의 후손들은 광주 언주, 과천 청계 등 현 서울 서초구 일대에 대대로 정주하게 된다. 그가 이일관의 9대조가 된다.
8대조 이징(李徵)은 세보에는 선무랑 목청전직으로 나와있는데〈우계이씨세보〉, 실록을 보면 성종실록에 그가 군관으로 충찬위에 보직되었다가〈성종실록〉, 뒤늦게 선무랑 목청전직이 되었다.〈세보〉 목청전(穆淸殿)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잠저이며 그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뒤에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7대조 이지방(李之芳, 1466 ~ 1537)은 1466년 무과에 급제하여 회령부사, 종성부사, 의주목사 등을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냈다. 그의 이름이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대동운부군옥 등에 두루 나타난다.〈대동야승, 연려실기술, 대동운부군옥〉 6대조 이광식(李光軾, 1493 ~ 1563)은 149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갑산부사, 종성부사, 여주목사, 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543년에는 평안도에 여진족이 쳐들어와 변장들을 살해하고 소란을 피우자, 야인소굴에 들어가 조선인 변장들이 야인을 함부로 죽인 것에 원한을 품은 것을 알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여 소란을 진압하였다.〈명종실록〉 이후 동지중추부사, 상호군, 병조참판 등을 거쳐 1555년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가 그해 왜구가 10진을 함락시키는 을묘왜변이 발생하자, 왜구 진압에 참여하였다.
광식의 아들이 이계변〈족보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文化柳氏嘉靖譜 604, 文化柳氏嘉靖譜 655, 文化柳氏嘉靖譜 141 등에 등장한다. 어려서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감(李戡), 이전(李晉+戈), 이용(李庸+戈) 등인데, 이 중 이전은 충장공 이복남(李福男) 및 무반 가계의 선조가 된다.
5대조 이감(李戡)은 1543년(중종 38)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의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가의대부 사헌부대사헌에 이르렀다. 그는 사림파의 정적으로 활동하여 윤원형, 이량 등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1563년 심의겸이 기대항을 사주해 이량을 탄핵할 때 같이 몰락하여 충청도 수안으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남도 경원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음에도 유배지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의 문인 중 한명은 조선 선조 때의 무관으로 임진왜란 때 진지방어와 병사 훈련을 직접 하다가 순직한 경주최씨 최대양(崔大洋)이다.〈관곡집 (寬谷集) 중 僉使崔公行狀〉
이감은 풍천임씨로 좌참찬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에게서 성헌(成憲) 등 1남 2녀를 두었고, 후취인 예천윤씨 혹은 예산윤씨에게서 희헌(希憲), 유헌(有憲), 의헌(宜憲)과 안동 권봉수(權鳳洙)에게 출가한 딸을 하나 두었다. 이희헌은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활동하였고, 희헌의 후손 중에 문과 급제자가 증손 이상우(李商雨)와 7대손 이현상(李顯相)이 있다.
가족이력
고조부 이성헌(李成憲, 1534~1601)은 이한(李澣)의 딸 및 세종의 제5왕자 밀성군 침(密城君 琛)의 증손 광원수 이구수(廣原守 李龜壽)의 딸과 결혼했고, 이중 광원수의 딸 전주이씨에게서 문과급제자 명남(命男), 길남(吉男)이 태어난다.
증조부 이길남(1561~1644)은 처음 이름이 영남(永男)이었다가 뒤에 개명했으며, 음보로 선무랑을 지냈다. 길남은 하동정씨 하남부원군 정숭조의 손자인 도사 정욱의 딸과 혼인하고 경복(慶復), 경항(慶恒)을 두었다. 경복은 청주한씨 교리 한영(韓詠)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사망했다.〈송파집 중 선조고 증좌승지부군묘표음기〉 우계이씨세보나 청주한씨 한영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경복의 조카이자 이경항의 넷째 아들 송곡 이서우(李瑞雨)가 친조부 이길남의 묘표음기를 쓴 것을 남긴것에서 확인된 것이다. 송곡 이서우는 이일관의 넷째 삼촌이다.
할아버지 이경항(李慶恒, 1601~1643)은 1613년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사마방목〉, 1617년에는 박사제자로 특별 채용되어〈국조문과방목 중 이경항의 전력란〉 1626년에는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통훈대부 사복시첨정 춘추관기주관에 이르렀고, 사후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자헌대부 예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그는 효령대군 보의 7대손으로 그의 아들 의성군 채(義城君 寀)의 후손인 전라도수군절도사 이경유(李慶裕)의 딸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다. 이 중 장남이 그의 아버지 이덕우이다.
할아버지 이경항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이는 송곡 이서우가 쓴 제백씨문(祭白氏文)에 先君遺體。男女八人。或殤或夭。強半凋淪。伯兄仲姊。에 선군이 남긴 유체로는 남녀 8인인데 혹은 상하고 혹은 요절했다. 반은 강하고 반은 약하니, 백형과 중매라 하여, 당시 맏형 이덕우가 사망할 때, 일찍 죽은 둘째 누이, 이일관에게는 둘째 고모를 언급하였다.
장남이 그의 아버지 이덕우이고, 차남은 이가우(李嘉雨, 1621~1646), 셋째는 이희우(李喜雨)인데, 이희우는 1810년 이후에 작성된 우계이씨세보에 번번히 누락되었는데 아마도 다른 집안(아마도 그의 백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의 양자로 가는 바람에 족보에 실리지 못하고 누락된 것 같다. 사마방목의 이서우(李瑞雨)의 안항 기록에 등장하면서 다시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다. 넷째는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 1633~1709)이다.
첫째 고모는 파평윤씨 관찰사 윤득열(尹得說)의 후처로 출가하였고, 둘째 고모는 일찍 요절했으며〈송파집 중 제백씨문(祭白氏文)〉, 셋째 혹은 넷째 고모는 이서규(李瑞圭)에게 출가하였다.<우계이씨세보> 셋째 혹은 넷째고모부인 이서규는 세보에는 별좌로 나와 있는데〈우계이씻씨세보〉, 미수 허목이 쓴 첨정이공묘갈명에는 진사로 되어 있다.〈미수기언 중 첨정이공묘갈명, 국조인물고〉 이서규에게 출가한 고모에게서는 고종사촌인 이동진(李東鎭), 이기진(李箕鎭) 등이 태어났다.
그의 둘째 숙부 이가우(李嘉雨)는 족보에는 1705년 7월 15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로 추정된다. 호주 채유후가 쓴 이군묘갈명에는 癸未僉正公竟不起。君號踊不暫 輟。朝夕祭奠。雖困篤必參。以死自期。纔過朞又不起。節哀順變。君非不知。而不自顧愛。終爲滅性之歸。嗚呼傷哉。君有高才至行。이란 대목이 있어 부친 이경항의 상을 마치다가 돌아갔다는 부분이 있다.〈호주집 제6권 이군묘갈명〉 이는 가우는 무성한 재주가 있었는데, 불행히도 천명을 얻지 못했다. 嘉雨有茂才。不幸無命。는 대목과도 일치한다.〈미수기언 중 첨정이공묘갈명, 국조인물고〉 그밖에 이가우의 절친한 지우였던 반계 유형원이 그의 행장 이자시전을 남겼으나 실전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가우는 1646년에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 족보에 나온 1705년졸은 그의 동생이자 이서우의 다른 형 이희우(李喜雨)의 기록으로 봐야 되며, 진사 역시 향시를 봤다면 사마방목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해진다. 1646년 3월 14일이 이가우의 졸년월일이며, 1705년 7월 15일은 오랫동안 족보에서 누락되었던 이희우(李喜雨)의 졸년월일이 확실해보인다.
배위
현재까지 전하는 족보상의 기록으로 공에게는 아들 이전(李爽+田)과 청송심씨 심일주(沈一柱), 평산신씨 신만제(申萬濟), 심필태(沈必泰), 하동정씨 정형우(鄭衡佑) 등이 있다. 이중 몇몇 사위들의 기록에 일부 나타나 있다.
고령신씨 신만제의 부인인 공인 우계이씨의 기록에 아버지 부사 일관, 조부 덕우, 증조 첨정 이경항, 외조 해주 최주우(海州崔柱雨)로 나타나 있다.
이일관의 본부인은 청주한씨 청하현감, 경주진관을 지낸 한공억의 딸 청주한씨로 심이관에게 출가한 딸과, 심일주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이일관의 계부인은 해주최씨 최주우의 딸로 고령신씨 신만제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그러나 다른 사위인 청송 심필태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심필태가 다른 본관의 심씨인지 여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밖에 하동정씨 정형우에 대한 기록 역시 찾을수 없었다.
그의 형제자매에 대한 기록은 없어 이일관의 자녀가 몇 명이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이재가 쓴 윤시경(尹時卿, 1642~1685) 묘갈명인 通德郞尹公墓碣에 配羽溪李氏德雨女。無育。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이재(李縡)의 도암집(陶菴集) 通德郞尹公墓碣〉 그의 매부 윤시경은 죽재(竹齋) 윤인함(尹仁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기도도사 홍의(弘毅) 아버지는 정랑 유근(惟謹)이었다.
생애
이일관의 생년은 미상이며, 아버지 이덕우의 생년도 미상이고, 어머니의 본관과 성씨 역시 미상이다. 다만 그의 할아버지 이경항(李慶恒) 1601년에 태어나 1643년에 졸하였고, 할머니 전주이씨는 1600년에 태어나 1667년에 졸하였으며, 숙부 중 이가우(李嘉雨)는 1621년에 태어나 1646년에 졸하였고, 어느 곳으로 출계했는지 알수 없는 다른 숙부 이희우(李喜雨)는 생년은 미상이나 1705년에 졸하였다. 그리고 송곡 이서우(李瑞雨)는 1633년에 태어나 1709년에 졸하였다. 윤득열에게 시집간 고모와 일찍 죽은 둘째 고모, 이서규에게 시집간 셋째 혹은 넷째 고모와 또다른 고모가 있었다.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이일관의 아버지 이덕우의 출생년대를 미루어 짐작해야 되는데, 10세 이후에 결혼하는 조혼 풍습이 있었지만 실제 자녀를 얻을 수 있는 나이는 13세 전후 이후였으므로, 아버지 이덕우의 출생년대는 1616년에서 1620년 정도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일관의 출생년대는 대략 1632년에서 1640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이덕우는 1687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송곡 이서우의 시문을 연구한 연세대 대학원 임미정의 연구에 의해 발견, 확인되었다.<임미정, 송곡(松谷)이서우(李瑞雨)의 시문학(詩文學)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이일관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어느 무과에 어느 등급으로 입격하였는지는 무과방목의 기록 누락으로 전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행적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승정원일기에 단편적으로 전한다. 1679년(숙종 5년) 5월 27일 이일관, 강필우(姜必遇), 허개(許諧) 등은 수문장무겸 (守門將 武兼)에 임명되었고〈승정원일기 270책 (탈초본 14책) 숙종 5년 5월 27일 경신 13/18 기사 1679년 康熙(淸/聖祖) 18년李觀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1679년 8월 6일에는 훈련주부 무겸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 272책 (탈초본 14책) 숙종 5년 8월 6일 무진 26/30 기사 1679년 康熙(淸/聖祖) 18년李惟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1680년(숙종 6)에는 무겸선전관으로 재직 중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보사원종공신 개수녹권(保社原從功臣改修錄券) 8페이지>
1690년(숙종 16) 4월 1일에는 노광협(盧光協)과 함께 OO(글자 마멸)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승정원일기 340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4월 1일 임술 4/27 기사 1690년 康熙(淸/聖祖) 29년李觀漢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그러나 8월 14일의 기록에 의금부에서 계를 올렸다는 것으로 보아 의금부도사로 확인되었다.
義禁府啓曰, 今此陵幸時, 本府都事九員, 依例隨駕, 一員當爲守直, 而都事十員內, 四員出使, 一員未差, 不得推移, 出使都事李日觀·李命麟·洪灝·李溥, 令該曹竝卽閑官換差, 未差之代, 亦爲口傳差出, 何如? 傳曰, 允。〈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8월 14일 임신 7/7 기사 1690년 康熙(淸/聖祖) 29년, 陵幸에 隨駕해야 하는 本府都事가 부족하므로, 出使都事는 閑官으로 換差하고 아직 差任하지 않은 자도 口傳으로 差出하기를 청하는 義禁府의 계〉
1690년(숙종 16) 8월 17일에는 금부도사로, 문출죄인, 문외출송죄인 연(㮒, 복평군)을 나래(拿來)하러 출발〈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8월 17일 을해 7/9 기사 1690년 康熙(淸/聖祖) 29년, 李日觀이 李㮒을 拿來하기 위해 나감〉, 그날 오후 복평군 이연을 나래하여 되돌아왔다.〈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8월 17일 을해 8/9 기사 1690년 康熙(淸/聖祖) 29년, 李日觀이 李㮒을 拿來하고 들어옴〉
1690년(숙종 16) 8월 25일 이조의 구전정사 때 의금부도사 이일관과 장원서별제 이만범(李萬範)의 직을 서로 상환하여 임명하였다.〈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8월 25일 계미 2/5 기사 1690년 康熙(淸/聖祖) 29년, 李師賢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1690년(숙종 16) 10월 24일 사헌부감찰에 임명되고〈승정원일기 343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10월 24일 신사 10/15 기사 1690년 康熙(淸/聖祖) 29년, 朴泰長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1691년(숙종 17) 8월 23일 평안도 마점별감(平安道點馬別監)에 임명되었으며〈승정원일기 346책 (탈초본 18책) 숙종 17년 8월 23일 을사 7/21 기사 1691년 康熙(淸/聖祖) 30년, 點馬別監의 명단〉, 1699년(숙종 25) 10월 20일에는 21일 모화관에서 열리는 무과전시의 참시관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明日慕華館武科殿試時, 參試官三, 李彦綱·羅弘佐·禹瑞奎, 參考官三, 李德英·李汝玉·李日觀。〈승정원일기 387책 (탈초본 20책) 숙종 25년 10월 20일 갑신 3/15 기사 1699년 康熙(淸/聖祖) 38년, 내일 慕華館 武科殿試의 參試官 등의 명단〉
1700년(숙종 26) 7월 13일 훈련부정(訓鍊副正)〈승정원일기 392책 (탈초본 20책) 숙종 26년 7월 13일 갑진 23/23 기사 1700년 康熙(淸/聖祖) 39년, 沈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1700년(숙종 26) 9월 25일 훈련정(訓鍊正)이 되어〈승정원일기 393책 (탈초본 20책) 숙종 26년 9월 25일 갑인 14/14 기사 1700년 康熙(淸/聖祖) 39년, 李日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사은숙배하였다.〈승정원일기 393책 (탈초본 20책) 숙종 26년 9월 26일 을묘 4/12 기사 1700년 康熙(淸/聖祖) 39년, 姜履相 등이 사은함〉
1701년(숙종 27) 1월 25일 충주영장(忠州營將〈승정원일기 395책 (탈초본 21책) 숙종 27년 1월 25일 계축 13/33 기사 1701년 康熙(淸/聖祖) 40년, 趙爾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1703년(숙종 29) 1월 27일 우림장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다.〈승정원일기 409책 (탈초본 21책) 숙종 29년 1월 27일 계유 11/14 기사 1703년 康熙(淸/聖祖) 42년, 閔純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승정원일기 409책 (탈초본 21책) 숙종 29년 1월 27일 계유 14/14 기사 1703년 康熙(淸/聖祖) 42년, 閔純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1703년(숙종 29) 7월 18일 창성부사(昌城府使)에 임명되고〈승정원일기 413책 (탈초본 22책) 숙종 29년 7월 18일 임술 17/18 기사 1703년 康熙(淸/聖祖) 42년, 金德基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동년 8월 16일 하직인사를 하고 부임하였다.〈승정원일기 414책 (탈초본 22책) 숙종 29년 8월 16일 기축 4/19 기사 1703년 康熙(淸/聖祖) 42년, 沈齊賢 등이 하직함〉
1705년(숙종 31) 6월 22일에 창성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여〈승정원일기 425책 (탈초본 22책) 숙종 31년 6월 29일 신유 4/13 기사 1705년 康熙(淸/聖祖) 44년, 22일 李日觀이 사망했다는平安監司의 서목〉, 평안도관찰사 최석항(崔錫恒)이 동년 6월 29일 보고하였다.〈승정원일기 425책 (탈초본 22책) 숙종 31년 6월 29일 신유 4/13 기사 1705년 康熙(淸/聖祖) 44년, 22일 李日觀이 사망했다는平安監司의 서목〉 애석하게도 묘표나 신도비문에 대한 기록들은 나타나지 않아 장지가 어디인지는 찾을수 없었다.
자녀와 후손
청하현감, 경주진관을 지낸 한공억의 딸 청주한씨에게서 아들 색(爽+田)과 청송심씨 심이관에게 출가한 딸, 청송심씨 심일주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그밖에 청송심씨 심필태에게 출가한 딸도 청주한씨부인 소생으로 추정되나 확인할수 없다.
이일관의 계부인은 해주최씨 최주우의 딸로 고령신씨 신만제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하동정씨 정형우에게 출가한 딸 역시 족보순서상으로 볼 때는 해주최씨 소생으로 추정될 뿐이다.
아들 이상(爽+田, 1681 ~ ?년 8.16.)은 최씨와 결혼하였으나 최씨의 친정과 본관은 전하지 않는다. 자녀가 없어 이일관의 4촌이며 이서우(李瑞雨)의 차남 이석관(李碩觀)의 손자로, 이번(李番, 1686.03.21.~ ?.09.26.)의 아들 복일(馥一, 1704.9.27. ~ ?.04.09)을 양자로 들였다. 복일은 의령남씨(1705.3.6.~?.10.5)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고, 묘소는 대장동에 있다 한다.